<단편> 바닷가 여인숙



(단편)

바닷가 여인숙

The Inn by the Sea

곽명규


(#1.a.)

떠날 때부터 외로운 여행이었다. 윤아가 동행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다. 만일 우리의 여행을 반대하는 것이 오직 그녀의 아들들뿐이었다면, 아마 윤아는 고민 끝에 결국 나를 따라 나서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은근히 믿고 있던 내 딸마저 이 여행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겨우 받치고 서 있던 외기둥마저 쓰러진 꼴이 되어, 가뜩이나 흔들리던 작은 확신마저 무너져 버리고 만 것이다.

“이 여행은 한 마디로 허니문이에요. 그러니까 꼭 가시려면 결혼식부터 하고 가세요.”

딸이 결론처럼 내던진 이 말 앞에서 나 자신도 한참동안 말을 잃었었다.

“잠은 따로 잘 거야. 방을 두 개 빌렸어.”

처음 여행 계획을 설명할 때부터 이 말을 분명하게 해 주었으나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방을 따로 쓰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이 여행의 성격이에요.”

“성격이라면, 동창의 초대로 결혼식에 참석하는 공식 여행이라는 게 성격인데?”

“그러니까 문제죠! 모두들 부부동반으로 참석하는 공식 모임에 함께 간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 앞에서 부부라고 공개 선언을 하는 것과 다름없잖아요. 다들 두 분을 실질적인 부부라고 생각할 거예요.”

딸은 분명한 원칙과 논리로 무장한 채 절벽처럼 완강하게 버텼다. 아마 확실한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우리의 여행이 아니라 결합 자체를 반대하려는!

결국 나는 윤아의 동행포기 결정을 받아들이고 혼자 여행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오랜 친구인 잔 리--미국 이름으로 소개한다--는 겉으로는 소심한 바보들이라며 놀려 대겠지만, 마음속으로는 우리의 입장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매우 섭섭해 하겠지만.

“뭐라구? 그 꾀꼬리 백윤아 씨와 지금 사귀고 있다구? 야아, 그거 세기의 뉴스로군. 잘 됐네. 이번에 꼭 둘이 함께 오게. 여기선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걱정 말고! ...정 그렇다면, 자네들 둘이 각방을 쓰도록 내가 직접 예약을 챙겨 놓겠네. 윤아 씨에게도 그렇게 말하게나. ...야아, 이게 얼마만인가? 우리 셋이서 한 번 밤을 새우며 옛날 얘기를 해 보세!”

잔 리가 이렇게 흥분한 목소리로 그녀와의 동행을 부추기는 동안, 나는 이 절호의 기회를 꼭 잡아야만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거듭거듭 망설이는 말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래도 혹시 호텔에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쩌나 싶어, 얼른 확답을 못하겠어. ...뭐, 나야 그래도 괜찮다고 하겠지만, 윤아는 아무래도 입장이 좀 다르지 않은가.”

“그럼, 이렇게 하지. 아예 자네들 둘만 뚝 떨어진 작은 여인숙에 묵도록 해 놓겠네. 그러면 신경 쓸 일이 전혀 없을 것 아닌가.”

바로 이 말이 빌미가 되어, 잔 리의 늦둥이 외딸 결혼식에 윤아와 함께 가겠노라고 내 마음대로 약속을 하게 되었었다.

“처음엔 윤아도 좋아했었는데, 이제는 차라리 없었던 것보다 못한 일이 되고 말았군.”


(#1,b.)

“그룹이세요? 혼자세요?”

“혼자입니다.”

“여행 목적은, 비즈니스인가요, 아니면 놀러 오셨나요, 친지를 방문하러 오셨나요?”

“글쎄요. 이럴 땐 뭐라고 해야 되나요? 결혼식에 초대돼서 온 건데요. 친구의 외딸 결혼식이죠.”

“그러세요? ...카멜(Carmel)에 사시는 분인가 보죠?”

“아닙니다. 그건 제가 묵을 여인숙 주소죠. 친구네 집은 샌프란시스코인데, 결혼식을 내일 저녁 카멜에서 한다는군요.”

“와아, 부자신가 보네요? 카멜까지 내려가서 결혼식을 한다니.”

“글쎄요. ...신랑 쪽이 부자인지 모르죠.”

하마터면 촌스럽게도 신랑이 미국인이라는 말까지 덧붙일 뻔 한 것을 잘 참았다. 잔 리도, 그의 딸도, 모두 시민권을 가진 미국인이었다.

“결혼식 뒤에는 무얼 하실 거죠? 방문하실 가족이나 친척이 있으세요?”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좀 막막한데요? 딸 시집보내 놓고 심란해 있을 친구더러 관광 가이드를 하랄 수도 없고...”

“그렇겠군요. ...그런데 미국서 공부하셨나요? 영어가 좋은데요?”

“네. 옛날에, 엘에이(L.A.)에서 몇 년...”

“엘에이요? 유씨(UC:캘리포니아 대학교)?”

“유씨 중 하나죠.”

“샌프란시스코에도 와 보셨나요?”

“그럼요. 친구들하고 여러 번 왔었지요. ...졸업하고 귀국한 뒤에도 출장으로 몇 번 왔었구요. ...그래서 이번엔 와이너리(포도주 제조장) 투어나 해 볼까 하는데....”

“아아, 나파 밸리(Napa Valley)?”

“거긴 좀 멀 것 같고... 카멜 부근에 와이너리가 있다면...”

“카멜 쪽에도 좋은 와이너리가 많아요. ...그럼, 여행 잘 하세요.”

이민국 여자는 여권에 스탬프를 찍으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1.c.)

공항에서 빌린 포드 임팔라 승용차는 처음에는 운전하기가 좀 불편했지만 프리웨이(무료 고속도로)에 올라설 무렵부터는 그런 대로 익숙해졌다. 그러나 혼자 가는 여행이어서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 하늘마저 두꺼운 회색 천막으로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윤아와 함께였다면--!”

한숨을 타고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그랬다면, 이 삭막한 고속도로가 명승고적의 드라이브 코스처럼 로맨틱하게 느껴졌을 텐데... 아마 나는 들뜬 목소리로 눈에 보이는 것마다 설명을 해주느라고 정신이 없었을 테고.”

다시 한 번 한숨이 나왔다. 그런 날이 언제 올 것인지, 또 오기는 정말 올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윤아를 만난 것은 <어린이집>에서였다. 손주를 항상 이모--우리 집에서는 <큰엄마>라고 불렀지만, 남들은 다들 <이모>라는 호칭을 썼다--가 데리고 다녔었는데, 그 날은 몸살감기로 기침을 하며 두 눈이 쑥 들어갔기에 조퇴를 시켰던 것이다.

처음으로 어린이집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처럼 아이를 데리러 온 여인 하나가 소파에 앉아 있다가 힐끗 내 쪽을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나는 목례를 하며 조그맣게 인사를 건네고 그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안쪽으로부터 아이들의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 노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젊은 여인이 안에서 나오며 말을 붙였다.

“손주를 데리러 왔는데요.”

“어떤 손주세요?”

“외손주인데요.”

“아니요. 이름이 뭐냐구요.”

“이름요? 서윤이요, 신서윤!”

“네에, 서윤이요? ...왜 이모가 안 오시고요?”

“몸살감기로 병원엘 가서...”

“아아, 아까도 콜록거리더니! 그럼... 죄송하지만... 본인 확인을 해도 될까요? 처음이시라서...”

“본인 확인요? 그게 뭔데요? 어떻게 하는 거예요?”

“틀림없는 보호자시라는 걸 확인하는 거죠. 저희가 미리 아기들의 가족을 다 등록해 놓았거든요. 등록된 분들만 아기를 데려갈 수 있도록요.”

나는 이름과 주소와 생년월일을 모두 대주고, 또 아이 엄마의 주민등록 번호를 외워낸 뒤에, 운전면허증까지 보여주고 나서야 손주를 데려갈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하비-!”

서윤이가 다른 아이 하나와 손을 잡고 나오다가 나를 보고 소리치며 달려왔다. 나는 가만히 팔을 벌리고 일어서서 다가오는 서윤이를 바라보았다.

“함미-!”

함께 나오던 아이도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오냐!”

옆에 앉았던 여인이 앞으로 뛰어나가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라고 부르기에는 아직도 조금 이른 것 같은 여자였다. 그녀는 작은 웃음이 실린 입술을 약간 오므리듯 잡아당기며 말했다.

“저어, 혹시, 옛날에 M대... 합창단장 하시던....”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저, 백윤아예요, 불문과.”

“네에? 백윤아 씨? ...소프라노?”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순간이었다. 거의 사십년 만에 대학 후배 윤아와의 재회가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날 어린이집 현관을 나서기도 전에 그녀와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다.


(#1.d.)

산호세라는 표지가 눈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프리웨이가 붐비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선을 바꾸기 곤란할 만큼 촘촘해진 간격 속에서도 기분은 오히려 한결 가벼워졌다.

“지금 온 만큼만 더 가면, 목적지인 카멜로 향하는 태평양 연안 하이웨이(Pacific Coast Highway)를 만나면서, 바다냄새가 나기 시작하겠지.”

바다가 아직은 먼 곳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어느 새 창문을 열고 벌써 카멜에 도착한 듯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바다 냄새! 그것은 어떤 때는 외로움과 그리움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벌레처럼 가슴속을 파고들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잠자고 있던 모험심과 용기를 마구 부추기는 흥분제가 되기도 한다. 나는 아직 보이지 않는 먼 바다의 마법에 스스로 걸려들고 있는 듯, 발바닥으로부터 가슴까지 파란 물결이 빠르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카멜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십년 쯤 전에 그곳을 지나다가 단 하룻밤을 쉬고 갔을 뿐이어서 기억의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새하얀 모래와 끝없는 태평양의 찬란한 빛깔에 현혹되었던 그 아침의 조용한 해변만은 지금도 내 망막 위에 또렷한 그림으로 새겨져 있었다.

“어젯밤 억지로 샌프란시스코까지 올라갔으면 어쩔 뻔 했어요?”

모래 끝을 적시는 파도 위로 끊임없이 날아오르는 어린 갈매기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탄성을 지르던 나에게 아내가 자랑을 섞어 던진 말이었다.

“큰일 날 뻔했지.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를 평생 모르고 살 뻔 했어.”

“옛날에 여러 번 이쪽을 지나 다녔다면서요?”

“그 땐 언제나 샌프란시스코까지 먼 길을 서두르느라고 그냥 지나쳐 가기만 했었지. 카멜이라는 데는 아마 보잘 것 없는 작은 시골마을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이렇게 아름다운 곳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당신은 미국에 살아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나보다 더 잘 알 수가 있지? 일부러 숨겨 놓은 보물 같은 이곳을 어떻게 찾아 냈느냐구.”

“찾아 낸 게 아니에요. 사실은, ...당신에게 보여주려고, 내가 만들어 놓은 거지요, 하 하 하.”

“허허. 그렇게 말해도 어쩔 수 없군.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어.”

“아니, 정말이에요! 내가 결혼기념일 선물로, 하얀 모래도 퍼다 놓고, 파란 바다도 파 놓은 거라고요!”

“그래. 고마워. 정말 당신 선물이라고 생각할게.”

나는 카멜의 바닷가를 정말 아내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뒤엔 이 이야기를 <숨어 있는 아름다움과 마주치는 기쁨>이라는 수필로 엮어서 동창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

“카멜이 아내의 선물인 것처럼, 아내 또한 이 세상으로부터 나에게 주어진 작고도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 또한 아내에게 작으나마 귀한 선물이 될 수 있도록, 남은 삶을 잘 가꾸어 나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수필의 마지막 단락이었다. 아내가 떠난 지 벌써 여러 해 되었지만, 그 날 아침 바닷가에서의 대화는 가슴 아픈 영화의 끝 장면보다도 더 또렷하게 내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끼며 창문을 닫았다. 차는 어느 새 프리웨이를 벗어나 태평양 연안 하이웨이를 달리고 있었다.



(#2.a.)

<바닷가 여인숙(The Inn by the Sea)>은 문자 그대로 바닷가에 있기는 했지만 하얀 모래가 깔린 해변으로부터는 약간 떨어진 언덕 위에 외롭게 올라앉아 있었다.

돌담 가운데에 뚫려 있는 열린 대문을 통해 키 작은 꽃들이 듬성듬성 피어 있는 작은 마당에 들어서자, 통나무집처럼 둥근 목재로 외벽을 두른 오두막집이 끝없는 바다를 배경으로 홀로 서 있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야아! 야아!”

입을 벌리고 서서 감탄사를 쏟아내는 윤아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윤아는 마당 끝의 낮은 담 너머로 바다만 내다보고 서 있었다.

여인숙의 목제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자 머리 위에서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좁은 로비 안쪽에 작은 책상을 놓고 앉아 있던 리셉션이스트 할머니가 안경 위쪽으로 웃음을 띠워 올리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킴인데요...”

내가 먼저 인사를 던졌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바바라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내 뒤쪽으로 잠깐 눈길을 보냈다.

“일행 분은... 함께 안 오셨나 봐요?”

“아, 네. 실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저 혼자만 오게 됐습니다. 미리 연락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 집 전체를 쓰시도록 돼 있으니까요. 다른 손님은 받지 않기로 잔 리 씨와 약속을 했거든요.”

“집 전체를 쓴다구요?”

“놀라실 건 없어요. 워낙 작은 집이라서, 방이 모두 세 개 뿐이거든요. 정말 작죠? 하지만 <베드 앤 브렉퍼스트(Bed & Breakfast : 아침을 주는 작은 여인숙)>는 원래 다 작아요.”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저한테는. ...그런데 잔 리하고 잘 아시나 봐요?”

“네. 아주 잘 알지요. 제가 매일 오후에 도슨트로 일하고 있는 갤러리의 홍보 이사시거든요.”

그 말을 끝으로 바바라는 일어섰다. 나는 그녀를 따라 침실로 향했다.

“방이 작지요? 하지만 여기가 이 집의 <안방>이랍니다. 침대에 누운 채로 바다가 잘 보이도록 창문이 낮게 나 있지요. 혹시 넓은 방을 원하시면 건너편의 <손님방>을 쓰셔도 됩니다. 거기서는 바다는 조금 밖에 안 보이지만.”

“알겠습니다. 오늘은 우선 이 방에 있겠습니다. 누워서 좀 쉬면서, 바다도 내다보게요.”

“잘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이 방으로 안내한 거예요. 여자 분이 함께 오셨으면, 이 방은 그 분께 드리려고 했었지요. 그럼, 전 도슨트 일을 하러 갤러리에 가겠습니다. 저녁 때 잠깐 들를 거예요. 혹시 밤에 추우시면, 이 스위치를 올리세요. 벽난로가 바로 켜질 거예요. 그리고 내일 아침은 편리하신 시간에 로비 옆의 식당에 와서 드세요. 굿 나잇.”

나는 때 이른 밤인사에 퍼뜩 정신이 들어, 방을 나가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바바라! 그럼 오늘 밤 이 여인숙에는 완전히 나 혼자 뿐인가요?”

“아니에요. 저쪽, 돌담에 붙어 있는 별채에 제가 있고요, 또 아저씨 한 분이 청소나 빨래 같은 집안일을 돌보며 수시로 드나드시죠. 현관문은 항상 자동으로 잠겨 있을 거니까 안심하세요. 필요할 땐 언제든지 전화를 주시구요.”

바바라는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졌다.

낮게 깔린 창문을 통해 파도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잠깐잠깐 창밖의 바다를 내다보며, 또 가끔씩 음식냄새를 맡는 강아지처럼, 또는 와인 테이스팅을 하는 소몰리에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바다냄새를 맡았다. 비행기 여행의 피로로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바다냄새가 마취제처럼 온몸으로 스며들어 왔다.


(#2.b.)

“죄송해요. 자꾸만 돌아간 남편 얘기를 하게 돼서.”

윤아의 소프라노 목소리가 피아니시모로 들려왔다. 귀에 대고 하는 말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잘 들렸다.

“아니에요. 끝까지 자세하게 다 얘기해 주세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이야기 아니면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요?”

바리톤의 내 목소리가 포르테로 들려왔다. 나 자신의 귀에 대고 소리치는 듯, 웅웅거리며 크게 울렸다.

“고마워요.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오늘은 그만 할래요. 대신 김 선배 얘기가 듣고 싶어요. 두 분이 서로 무척 사랑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런 말을 종종 들었죠. 하지만 그 때마다 너무 부끄러웠어요. 제대로 못한 일을 두고 칭찬을 받는 것이라고 여겨졌죠. 윤아 씨는 어땠나요?”

“저도 그럴 때면 늘 부끄러웠죠.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었어요.”

“그래요. 옛날에는 부끄러워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사랑을 부정하기까지도 했었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요.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부정한다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위선이지요.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예의도 아니구요.”

“그렇죠? 우리 삶의 절반 이상을 함께 했던 귀한 분들인데요.”

“그래요. 그래요.”

긴 대화가 나레이션처럼 머리 위로 흘러 지나가는 동안 눈물방울들이 뺨 위를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하얀 모래가 부드럽게 깔린 해변의 한 가운데에 <외로운 소나무>처럼 서 있었고, 주변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윤아 만이 조금 떨어진 데서, 모래 위로 한가롭게 밀려들며 스러지는 잔물결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냥 지나갈 거예요? 옛날처럼? 당신을 위해서 준비해 놓은 게 있는데. 바로 이곳, 카멜 비치에.”

등 뒤쪽으로부터 아내의 목소리가 클라리넷처럼 부드럽고도 강렬하게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모래밭에 작은 발자국들이 한 줄로 나 있었다. 그 끝에 작은 소나무 숲이 보였다. 아내는 그 숲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나는 숲과 해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윤아는 맨발로 물가를 밟으며 점점 멀리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당신이 퍼다 놓은 모래! 당신이 파 놓은 바다!”

나는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 그 소리는 물결 위를 맴돌며 메아리처럼 흔들리다가 희미한 곡조의 노래로 바뀌며 바다 끝으로 사라졌다.

온 몸으로부터 역겹도록 심한 바다냄새가 피어올랐다. 나는 땀에 젖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바닷가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솟구쳐, 침대를 박차고 일어섰다.

누워서는 잘 내다보이던 바다가 통째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길고 가느다란 뿔 모양의 하얀 물건 하나가 창문 위쪽의 통나무 벽에 수평으로 걸린 채 내 눈을 가로막았다.

그 아래에는 작은 흑백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하얀 모자를 쓴 중년의 여인 하나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날이었던 듯, 여인의 가느다란 왼쪽 손끝이 둥근 챙을 살짝 붙잡고 있었다. 아마도 사진을 찍던 사람에게 무슨 말을 막 던진 참이었던 듯, 입술 끝이 조금 움직여진 채로 정지돼 있었다. 빛이 바랜 정도로 보아, 벽에 걸린 지 한 이십 년은 되었을 것 같은 사진이었다. 아래 쪽 여백에 파란 잉크로 <우나(Una)>라고 적혀 있었다. 그 글씨 또한 오랜 연륜을 말하듯 빛이 바래 있었다.

가슴이 마구 울렁거렸다. 종류를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가슴속을 치밀고 올라오고 있었다.

“바바라!”

나는 방을 뛰쳐나오며 로비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바바라가 갤러리에 간다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밤에 들르겠다고 했지? 그때까지 기다려야 되겠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멋쩍어진 걸음걸이로 여인숙을 빠져 나와 바닷가로 향했다.

“지금쯤 서울은 아침이 됐겠지. 윤아는 손주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와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겠지.”

휴대전화기를 꺼내 들고 단축번호 1번을 눌렀다. 신호가 몇 번 울리고 나자 녹음된 목소리가 나와서 메시지를 남길 것을 권했다. 그러나 나는 그냥 전화를 끊었다. 의문이 뒤를 이었다.

“일부러 받지 않은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윤아는 지금 나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있는 중?”

“메시지를 남기지 않은 것을 그녀는 어떻게 해석할까? 나 역시 우리의 결합을 재검토하고 있을 거라고?”

“내가 전화를 했었다는 걸 알면, 그녀는 답장을 할까? 그냥 다음 전화를 기다릴까?”

해가 서서히 바닷물 쪽으로 기울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문득 배가 고파 왔다. 나는 해변을 벗어나 카멜 시내로 들어갔다.


(#2.c.)

“아내와 브런치를 먹었던 음식점이 여기 어디 있을 텐데...”

정확한 위치는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럴 때는 느낌을 따라가야 한다. 느낌이 강렬해지기 위해서는 무의식 상태가 필요하다. 나는 무의식을 최대로 키우기 위해 기억과 판단을 억제하며 꿈꾸듯 거리를 걸었다.

“판당고(Fandango : 스페인 무곡 또는 무도회)”

문득 걸음이 멈춰진 곳에 이런 간판이 걸려 있었다. 하얀 페인트를 칠한 목제 창문 아래로 빨간 꽃의 화분 몇 개가 놓인 선반이 매어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비교적 작은 홀이 한 눈에 들어왔다. 홀의 가운데는 비어 있었고, 흰 테이블보를 씌운 작은 식탁들이 그 가장자리에 둥글게 배열되어 있었다.

“예약을 안 했는데, 자리가 있을까요?”

“홀에는 예약이 찼고요, 저 뒤쪽 바에는 자리가 있는데....”

“거기라도 좋아요.”

바의 카운터 앞에는 키 높은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나는 제일 첫 번째 의자 위로 기어올라가 앉았다.

“마실 것을 좀 드릴까요?”

중년의 바텐더가 카운터 너머로 친근한 표정을 던지며 물었다. 그의 뒤쪽으로 스카치와 버본 몇 병이 보였다. 카운터 위에는 탄산음료와 생맥주를 따를 수 있는 수도꼭지들이 있었고, 그 위쪽 천정으로부터는 와인 잔 몇 개가 거꾸로 매달린 선반이 내려와 있었다.

“와인 리스트를 좀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리스트에는 나파, 소노마(Sonoma), 그리고 몬터레이(Monterey)와 카멜 순으로 북부 캘리포니아 와인들만 나와 있었다.

“프랑스 와인은 없나 봐요?”

“네. 찾는 사람이 없어서요. ...프랑스 와인을 좋아하시나보죠? 그 중에 특히 좋아하는 게 있으세요?”

“특별히 좋아하는 건 따로 없고요, 보르도(Bordeaux) 레드 와인을 주로 마시니까, 캐버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을 좋아한다고 할 수는 있겠네요.”

“캐버네 소비뇽이라면 이 지역 것도 좋답니다! 안 드셔 보셨나요?”

“네. 오늘 처음 와서...”

“그러시군요. ...그럼 이걸 한 번 맛보시죠.”

바텐더--이름이 룩이었다--는 검붉은 색깔의 와인 한 잔을 내밀었다. 생각보다 맛과 향이 좋았다.

“괜찮은데요. 어느 와이너리 것이죠?”

“카멜 밸리 것이죠. 카멜에서 조금 내륙으로 들어가면, 산골짜기 양쪽에 작은 와이너리가 몇 개 있죠.”

“아아, 그래요? 내가 이번에 와이너리 투어를 꼭 한 번 해 보고 싶은데, 가 볼 수 있는 데가 있을까요?”

“물론이죠. 내일... 금요일 낮이면 가능합니다. 실은 제가 거기서 도슨트를 하고 있거든요.”

“그거 아주 잘 됐네요.”

다음 날 카멜 밸리에서 룩을 만나 투어를 하기로 약속하고 나자, 여행의 목적이 다 이루어진 듯 마음이 홀가분해 졌다.

바에서는 홀의 일부만이 보였다. 그러나 점점 손님들이 몰려와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춤을 추기 시작하자, 왁자지껄 들뜬 홀의 분위기가 아주 잘 전달돼 왔다. 손님 중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유난히 많았다. 백 살 가까이 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윤아와 함께였으면!”

그랬으면 윤아는 자신이 아직 얼마나 젊은 사람인지,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귀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지, 일일이 말해 주지 않아도 저절로 깨달았을 텐데....

나는 한숨을 쉬며 그 집을 나왔다. 저녁 바람이 시원하게 내 몸을 쓰다듬었다. 자유롭고 즐거운 여행자의 입장은 아니었지만, 짐짓 기분을 내어 휘파람을 불며 여인숙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방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로비에 앉아서 바바라를 기다렸다.


(#2.d.)

아홉 시 쯤 되어서, 바바라가 현관에 들어섰다. 나는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굿 이브닝, 바바라. 갤러리 일은 잘 됐어요? 저녁도 먹었구요?”

“네, 고마워요. 킴 선생님은 혼자서 어떻게 지냈어요?”

“잘 지냈지요. 해변에 내려가서 <외로운 소나무>도 돼 봤구요. 와인을 곁들여 저녁도 잘 먹었구요. ...그런데, 실은 물어볼 게 있어서 기다리던 중이에요. 내 방 창문 위쪽에 걸린 사진과 긴 뿔에 대해서 말인데요.”

나는 잠깐 숨을 돌리며 어떻게 질문을 이어 갈까 생각했다.

“아, 그건... 옛날 이 집 주인이 안방에 걸어 놓았던 것들인데... 지금까지 그대로 놓아 둔 거죠.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있던가요?”

“이상한 건 없구요, 그냥 좀 궁금해서요. 그렇게 긴 뿔이 대체 어떤 짐승의 것일까 하고요.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사진 속의 여인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하지 못한 채로 말이 끊겼다.

“그런 뿔을 가진 짐승은 없어요, 이 세상에.”

“그렇죠? 역시 짐승의 뿔은 아니었군요. 옛날 유럽의 기사들이 쓰던 기다란 창 같은 건가요?”

“아니에요. 창처럼 생기기도 했지만, 뿔은 뿔이에요. 다만, 실존하는 짐승의 뿔이 아니라는 거죠. ...유니콘이라고 들어 봤어요?”

“유니콘요? 말처럼 생겼으면서 뿔이 달린, 상상 속의 짐승!”

“맞아요. 바로 그 짐승의 뿔이지요.”

“네에? 유니콘은 실존하는 짐승이 아닌데, 어떻게 그 뿔이 실물로 벽에 걸려 있을 수 있죠?”

“유니콘의 뿔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실물이거든요.”

“아아, 그러니까 작품이군요? 조각 작품!”

“글쎄요. 꼭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도 적절한 것은 아니에요. 만들 때는 작품이었을지 몰라도, 나중에 정말로 유니콘의 뿔이 되었거든요. 이해하기 어려우시죠?”

“네, 어려운데요. 혹 실화가 아닌 <전설>이라고 한다면 조금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바바라가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하지 않으려는 것 같아서, 나는 말을 맺지 않았다. 그녀는 꿈이라도 꾸기 시작한 듯, 표정에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그 전설을 좀 들려 줄 수 없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기다렸는데요.”

나는 조금 큰 소리로 바바라를 다그쳤다.

“그건 좀 곤란해요. 일반적인 전설이 아니라, 개인의 특별한 과거 이야기라서요.”

“프라이버시 때문이라면 강요할 수는 없겠죠.”

나는 잠깐 바바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조금 다른 방법으로 다시 말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 뿔 말이에요. 이 집 주인이 손수 만든 거죠? 사진 속의 여자 분에게 줄 선물로요? 사진도 바로 그 때 찍은 거구요?”

그녀는 약간 놀란 듯,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용기를 얻어 그 다음 부분까지 단숨에 말해 버렸다. 혹시 조금 황당한 이야기가 되더라도, 오히려 그 때문에 더 빨리 그녀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분은 서로 사랑했지요? 그렇지만 그건 현실에서의 사랑은 아니었어요. 유니콘처럼, 상상 속에 있는 사랑이었죠. 그렇지 않아요?”

“뭐라구요?”

바바라가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탁자 위에 거꾸로 놓여 있던 빈 와인 잔이 부르르 떨리며 나를 놀라게 했다. 바로 다음 순간,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뱉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것 같았다.

“선생님처럼 예리한 통찰력과 상상력을 가진 분은 처음 봅니다. 좋아요. 이미 다 알고 계신 거나 마찬가지이니, 약간 보충 설명하는 게 큰 잘못은 아니겠죠.”

이 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내 입장이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지금 외딴 바닷가 여인숙 전체를 통틀어 혼자 있는 손님이었다. 함께 있어야 할 윤아는 태평양 건너 서울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화연결도 되지 않았다. 일찍 잠을 자러 빈 방에 들어가 보았자, 창밖으로부터 밀려들어오는 바다 냄새와 파도 소리가 끝없는 악몽처럼 침대를 두드려댈 것이었고, 뒤척일 때마다 바다 쪽 벽으로부터는 뜻을 알 수 없는 길고 하얀 유니콘의 뿔과 빛바랜 사진 속의 여자가 번갈아가며 내 선잠을 깨워댈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그럼, 와인이나 한 잔 하면서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나는 판당고에서 기념으로 사 들고 온 카멜 밸리 와인의 코르크를 따기 시작했다.



(#3.a.)

“사진 밑에 적혀 있는 이름은 보셨지요?”

“이름요? 못 봤어요. <우나(Una)>라고만 적혀 있던데요. <우나>는 이태리 어로 <하나>잖아요? 목록 1번의 사진이라는 뜻이 아닌가요?”

“선생님은 정말 상상력이 뛰어나시네요. 그럼 이것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그 사진이 왜 유니콘의 뿔과 함께 걸려 있을까요?”

“그건... 아마 유니콘에게 뿔이 하나 밖에 없듯이, 그에게도 그녀 하나 밖에 없다는 뜻이 아닐까요? 좀 더 나아가면, 그녀가 바로 유니콘의 뿔이라고 말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바로 그거예요. 그는 <하나>라는 의미를 통해서 그 여인과 유니콘을 동일시했던 거예요. 그럼, 이제 제가 아주 중요한 것 하나를 알려드리지요. 그녀의 이름 말이에요. 선생님이 보신 <우나>라는 단어가 바로 그녀 이름이었어요. 이태리 출신인 어머니가 지어 준 것이지요. 아일랜드 발음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글쎄요. 유나? 영어처럼 그렇게 읽으려나요?”

“맞았어요. <유나>예요. 그럼 이제 모든 관계를 아시겠죠? <유나>와 <유니콘>은 원래부터 하나의 어원에서 나온 단어들이었던 거예요.”

“아아, <우나>가 <유나>였군요! ...그것이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이군요!”

이것은 바바라에게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낮에 <윤아>의 꿈을 꾸고 나서 그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왜 그렇게 가슴이 울렁거렸던가, 그 까닭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땐 <유나>라는 이름은 알기도 전이었는데, 왜 놀라셨죠?”

바바라는 내 뜻을 알지 못한 채 딴 소리를 했다.

“아아, 그 <유.나.>가 아니구요... 내 여자 친구 이름이 <윤.아.>인데요... <우나>라는 단어를 보자, 순간적으로 <윤아>가 떠올랐던 거예요 그리고 나도 모르게 <윤아>와 유니콘의 뿔을 하나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퍼뜩 놀랐던 거지요.”

바바라는 말없이 입을 벌리고 내 이야기를 듣다가, 눈을 한 번 껌뻑이고는 큰 소리로 물었다.

“뭐 하는 분이세요, 킴 선생님은?”

“나요? 뭐, 은퇴하고 손주 보는 사람이지요.”

“그것 말고요.”

“홀아비 된 지도 여러 해 되었구요.”

“또요.”

“글쎄, 뭘 더 말해야 될까요?”

“제가 맞혀 볼까요? 글 쓰는 분이시죠? 맞죠?”

“맞을 수도 있죠. 하지만 당장은 여자 친구에게 채이고 혼자 여행을 와서 잠을 못 이루는 불쌍한 사람일 뿐이죠.”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바바라와 잔을 부딪혔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내 앞에 <전설>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3.b.)

유나는 아일랜드 출신의 아버지와 이태리 출신의 어머니를 따라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주해 온 뒤 줄곧 뉴욕에서 자라났고, 뉴욕에서 결혼했다. 그녀보다 열 살 쯤 위였던 남편 톰은 엘에이 출신의 변호사였는데, 원천적으로는 독일계였다. 몇 년 후 톰이 고향인 엘에이로 옮겨 변호사를 개업하게 됨에 따라 그녀도 엘에이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바다를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뉴욕에서는 항상 동쪽 바다를 바라보았었다. 그쪽으로 계속 가면 고향인 아일랜드가 있겠거니 하면서 향수를 달래곤 했다.

톰은 줄곧 매우 바빴다. 그 대신에 돈은 많이 벌었고, 틈틈이 그림을 사 모으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이따금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갤러리들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사곤 했다. 한 번은 샌프란시스코 출장이 끝나고 갤러리를 기웃거리다가 카멜까지 내려오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그림이 아니라 바닷가에 작은 별장을 하나 사 놓고 돌아갔다. 유나를 위해서였다.

그녀는 아름다운 카멜의 바닷가를 좋아했다. 고향인 아일랜드 남서쪽 작은 해안 마을에서처럼 끝없는 서쪽 바다로 해가 떨어질 때, 하얀 모래가 깔린 작은 해변에 조금씩 조금씩 내려앉는 땅거미를 특히 좋아했다. 아이가 없었던 그녀는 점점 많은 날들을 카멜의 별장에 와서 혼자 지냈다. 톰은 가끔 카멜의 갤러리에 올 때 그녀와 함께 있었을 뿐, 대부분의 날들을 엘에이의 변호사 사무실과 여러 출장지에서 보냈다.

어느 날 톰은 카멜의 갤러리에서 뉴욕 출신의 시인 제임스를 알게 되었다. 그는 톰처럼 미술작품을 사 모으는 취미도 돈도 없었으나, 미술 전반에 걸쳐 조예가 깊었고, 특히 무엇을 만드는 손재주가 뛰어났으며, 그래선지 피아노도 아주 잘 쳤다.

제임스는 카멜의 바다가 좋아서 그곳에 정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흰 모래 해변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언덕 위에 작은 땅을 사서, 손수 설계한 대로 조그만 통나무집을 지었다. 방이 세 개 밖에 없는 집이었다. 안방은 특히 작았는데 침대에 누워서 바다가 잘 보이도록 창문을 낮게 만들었다. 건너편의 손님방은 조금 큰 편이었다. 그는 종종 친한 사람들을 불러 그 방에서 이야기도하고 와인도 마시고 시도 읊고 노래도 불렀다. 그의 고향 또한 아일랜드의 남서쪽 해안이었고, 고향집에서처럼 해가 떨어지는 먼 서쪽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카멜의 흰 모래 해변을 사랑했다.

톰은 제임스가 유나와 동향인 것을 특히 반겼다. 그래서 카멜에 올 때면 꼭 그를 만났다. 물론 유나와 함께였다.

“아일랜드 사람을 둘이나 알게 돼서 정말 행복하오.”

톰은 흥이 나면 이렇게 말했다. 유나와 제임스는 남매처럼 가깝게 지냈다. 톰은 항상 고향 생각만 하며 울적하게 살아온 유나에게 자신보다는 제임스가 더 필요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제임스는 유나를 사랑했다. 자주 그녀를 위한 시를 썼고 그것을 읽어 주었다. 또 종종 그녀와 함께 하얀 모래를 밟으며 해변을 산책했다. 톰은 그런 제임스를 매우 고마워했다.


(#3.c.)

어느 날 오후, 톰은 혼자 제임스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은 대화라기보다는 논쟁이었고 담판이었다. 주제는 유나였다.

“당신이 유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유나 또한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소.”

톰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마음의 병을 안고 외롭고 힘들게 살고 있는 유나에게 생의 의욕과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제임스 뿐이라는 것이 톰의 주장이었다.

“그러니 제발 나에게서 유나를 빼앗아 주시오. 그리고는 그녀와 항상 함께 있어 주고, 함께 바다를 바라봐 주며, 그녀를 위한 시를 써 주시오.”

톰은 눈물을 흘리며 제임스에게 유나를 부탁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그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유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잘 알고 있지요. 유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오직 고향의 바다를 그리워할 뿐이지요.”

제임스는 그렇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톰에게 약속했다.

“나는 지금처럼 계속 유나 곁에서 그녀를 지키겠습니다. 변함없이 시를 써 주고, 바다도 함께 바라보겠습니다. 내가 유나를 사랑하며, 그녀 때문에 시를 쓸 수 있는데, 어찌 그녀를 떠나겠습니까?”

그러면서, 톰에게도 끝까지 유나의 남편으로 있어 주기를 간청했다.

“알겠소. 그러나 오늘의 내 부탁은 우리가 모두 죽는 날까지 유효하다는 것도 기억해 주시오. 유나가 앞으로 만일에 살아 있는 인간인 당신을 바다나 고향보다 더 사랑하게 된다면, 그렇게 건강한 사람으로 돌아와 준다면, 그 때에는 설령 내가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해도, 당신은 반드시 내게서 유나를 구출해 달라는 말이오. 그리고 우리의 이 약속은 앞으로 절대 재확인해 볼 필요 없이 그대로 지킵시다.”

바바라는 결국 눈물을 떨구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부터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 속에서 일어난 파도가 내게로 몰려와 해일이 되어 쏟아졌다.

“바바라, 가슴 터지도록 아름다운 이야기로군요. 고맙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유니콘의 뿔 이야기가 남아 있군요. 그것을 마저 얘기해 주시겠지요?”

바바라를 좀 쉬게 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랬다가는 영원히 유니콘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바바라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3.d.)

“두 사람의 담판 바로 다음날부터 제임스는 그 뿔을 만들기 시작했지요. 아마 한 백일 쯤 걸렸던 것 같아요. 어떻게 만들었을지, 짐작이 가세요?”

“무슨 단단한 재료를 깎아서 만들었겠지요.”

“아니에요. 그 반대지요. 카멜의 해변에서 주운 작은 조개껍질이나 돌조각 같은 것들을 이리저리 이어 붙이고 다듬으면서 점점 크고 길게 만들어 나간 것이에요.”

“그것 참 특이하군요. 무슨 특별한 뜻을 담고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래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헤아리기는 어렵겠죠?”

“동감입니다. 그 뿔이 완성된 다음의 얘기를 빨리 듣고 싶군요.”

“네. 그 뿔이 완성된 날, 제임스는 유나와 함께 해변으로 나갔지요. 오후 늦은 시간이었어요. 해가 점점 바다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죠. 하얀 모래밭에 그려진 제임스와 유나의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어요.

어느 순간 제임스의 그림자는 앞다리를 들고 일어선 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자 그림자의 머리 부분에 그 뿔이 얹혀 졌죠. ‘유니콘이다! 제임스가 유니콘이 되었다!’ 유나가 그렇게 소리쳤어요. 제임스는 이제 그 뿔을 머리에 달고서 실존하는 유니콘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뿔 또한 그 때부터, 단순한 예술 작품을 넘어서, 실제 유니콘의 뿔이 된 거예요.”

“아아, 참으로 <전설>이 탄생한 순간이었군요!”

나는 그 말을 하고 나서 한참 동안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유나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나요?”

마침내 생각해 낸 말이 겨우 이것이었다.

“그로부터 약 백일 후에 저 세상으로 갔답니다.”

바바라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짧게 대답했다. 예상되었던 대답인 듯, 가만히 고개가 끄덕여졌다.

“제임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분은 이제 유니콘으로서, 또 창을 들고 백마를 탄 기사로서, 지켜야 할 여인이 없어지고 말았는데?”

“제임스는... 그 뒤 어느 날 해 질 무렵, 카멜에서 사라졌지요. 그 뿔과 유나의 사진만이 지금처럼 침실의 벽 위에 남겨져 있었어요.”

이것이 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나는 이야기를 그친 바바라 앞에서 한참동안 두 눈을 감고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유나와 제임스, 그리고 유니콘의 뿔! 이 세 단어가 번갈아가며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러다가 가끔 윤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머리에 뿔을 단 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절반 쯤 꿈을 꾸고 있었다.

바바라는 별채로 돌아가고, 나는 여인숙의 침대에 누워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다행스럽게도 벽난로의 불길이 끝없이 흔들거리며 내 어두운 방을 지켜 주었다.



(#4.a.)

이른 아침에 바닷가로 내려갔다. 아내와 함께 거닐었던 십 년 전의 바로 그 시간이었다. 희디흰 모래밭을 끝없이 건드리는 파도 위로 어린 갈매기들이 한가롭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윤아. 어제는 나 혼자 인생의 많은 것을 되돌아본 하루였다오. 지금은 전설이 되고 만 옛사랑의 이야기에 가슴이 메어져 잠들 수 없는 밤이었소. 이 작은 카멜의 바닷가에서, 감춰져 있던 진실들과 만나는 순간순간이 너무나 새롭고 감격스럽소.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와 부딪칠지 알 수 없지만, 혼자 떠난 여행의 외로움을 단숨에 녹여줄 엄청난 이야기들에 단 한 번만이라도 더 부딪혀보고 싶소. 저녁 때 가야 할 결혼식 전까지 이곳의 포도밭이나 산책해 볼까 하오. 흙을 먹고 자라난 포도가 발효되어 맛좋은 와인으로 익어 가듯이, 우리의 남은 시간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삶의 향기가 솟아나왔으면 좋겠소.”

나는 잠시 손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럴 때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다.

“전화를 받지 못해 죄송! 좋은 시간 보내고 오시길! 할 얘기는 모두 그 때에! 윤아.”

나는 전화기의 뚜껑을 닫았다.

“서울에 돌아가면 한 바탕 설전을 벌여야 할지도 모르지. 하려던 말들은 그 때까지 간직해 두는 것이 낫겠어.”


(#4.b.)

카멜 밸리의 와이너리는 룩의 말대로 자그마했다. 룩은 손님이 찾아올 때만 도슨트로서 안내를 했고, 보통 때는 포도밭을 돌아다니며 알갱이들이 제대로 커가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을 맡고 있었다. 나는 지난 밤 그에게서 들었던 포도 이야기들을 현장에서 확인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룩, 캐버네 소비뇽 포도를 볼 수 있겠죠? 그 포도가 얼마나 작고 껍질이 두꺼운지 확인해 봐야겠어요.”

그가 보여준 포도는 한 알의 직경이 10미리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깨뜨려 볼 필요도 없이 그냥 손가락으로 만지는 것만으로 벌써 껍질이 두껍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니, 와인 맛이 떫을 수 밖에!”

나는 룩 대신에 스스로 이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와인은 만일 혀끝에 살짝 갖다 댄다면 맛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지요. 그러니까 테이스팅을 할 때도 목구멍 바로 앞에까지 들어가 닿도록 입안으로 쭉 밀어넣어야 되는 것입니다. 떫은 맛은 우리 혀의 제일 뒤쪽 부분에서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제는 이런 설명을 누구에게라도 자신 있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포도가 이처럼 작게 자라는 것은 종자 때문이겠지요?”

“종자가 그렇기도 하죠. 그러나 더 직접적으로는 기후 때문이에요. 낮에는 포도밭이 태양을 받아 따뜻하지만, 밤이면 바닷바람이 계속 대지를 식혀서 많이 차가워지거든요. 그래서 거듭되는 큰 일교차의 스트레스로 인해 이렇게 작고 볼품없는 포도로 자라나게 되는 거죠. 하지만, 바로 그 스트레스가 있었기에 그토록 깊은 맛이 나는 레드 와인이 이 포도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되지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리가 통째로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한참동안 단 한 가지 생각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카멜 밸리의 뜨거운 햇볕과 차가운 공기처럼 사랑과 미움이 끊임없이 교차했던 아내와의 삼십여 년이 우리의 삶속에서 만들어 낸 것은 어떤 모양의 포도였을까?

“바로 우리 이야기로군요. 나의 열성과 당신의 무관심이 교차했던 우리의 결혼생활이 바로 이 캐버네 소비뇽 포도와 같은 모습일 거예요.”

아내가 만일 이렇게 말했다면 나는 무어라고 대꾸할 수 있었을까?

“미안하오. 우리의 작은 포도알들이 그나마 당신의 마음속에서는 나름대로 발효되고 숙성되어 괜찮은 와인이 되었지만, 내게서는 끝내 와인이 될 만큼 성숙하지도 못한 채 떨어지고 말았던 것 같구려.”

아마 이런 후회의 말이나 중얼거리며 힘없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으리라.

“여기 이 피노 누아(Pinot Noir) 포도를 보세요. 참으로 대조적이죠.”

룩은 캐버네 소비뇽보다 훨씬 크고 잘 생긴 포도를 집어 들어 내밀었다.

“이 포도는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에서 주로 심는 품종인데, 심한 기후 변화에 견디기 어려운 체질이어서 캘리포니아에서는 잘 심지 않던 것입니다. 이 포도밭에서도 현재 시험적으로 소량 길러보는 정도이지요. 껍질이 얇은 만큼 예민하고 까다로워서 아주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기르지 않으면 성숙한 포도로 자라나지 못해요. 그래서 종종 변덕쟁이 여인의 사랑에 비유되기도 한답니다. 하하.”

“아아, 부르고뉴의 와이너리들이 대체로 규모도 작고 생산량도 소량인 것이 바로 그런 까다로움 때문이겠군요.”

“그렇게 볼 수 있죠. 그리고 부르고뉴 와인이 보르도에 비해 빛깔이 곱고 즙이 맑으며 맛이 상큼하고 델리케이트하게 되는 것도 피노 누아 포도의 예민성 때문이지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앞으로는 캐버네 소비뇽보다 피노 누아를 더 좋아하게 될 것 같은데요.”

“킴 선생께 여자 친구가 있으신가보군요. 사귄지 얼마 안 된!”

“허허, 도사시군요!”

나는 실제로 윤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유달리 까다로운 성격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지금 그녀와의 관계가 꼭 어린 피노 누아 같아서, 앞으로 계속 잘 자라 줄 것인지, 그래서 마침내 빛깔 좋고 맛 좋은 와인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었을 뿐이었다.

카멜로 돌아오면서, 윤아의 짧은 문자 메시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결별선언의 예고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어쩌면 딸의 생각처럼 우리의 결합은 현명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 언제 죽음이 닥쳐올지 알 수 없는 나이에 까다로운 피노 누아 포도 같은 불확실한 사랑을 새로 시작한다는 것이 어리석지 않다고 말하기도 어렵겠지. 사랑이라는 길은 끝이 보이지도 않고, 도중에 끊어지거나 방향을 잃게 될지도 알 수 없는 멀고도 험한 길이니까. 윤아도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일 거야.”


(#4.c.)

미국에서 하는 결혼식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성당에서 하는 것이어서 결국은 똑같았다. 카멜 미션에서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된 혼배 미사가 끝나고, 피로연을 하러 시내의 호텔로 옮기기 위해 모두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굿 이브닝, 미스터 킴.”

마당에 바바라가 있었다. 그녀는 갤러리 동료의 차를 얻어 타고 식장에 왔다고 했다.

“그럼 피로연 장엔 내가 모시고 가지요.”

바바라를 태우고 호텔로 향했다. 그녀가 길 안내를 해 주어서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호텔은 <판당고>의 건너편에 있었다. 피로연은 음식과 구경거리로 이루어진 흔한 연회이겠거니 했는데, 기나긴 와인과 춤의 잔치였다. 신랑 신부와 양쪽 집 식구들 뿐 아니라, 대부분의 하객들이 그 호텔이나 바로 주변의 숙소에 머물고 있어, 밤이 늦어도 아무 걱정이 없다는 듯 오래오래 와인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나는 바바라에게 춤을 청했다. 그녀는 매우 고마워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좋은 데로 잠깐 모셔도 되겠죠?”

나는 바바라를 데리고 길 건너 판당고로 갔다. 판당고의 홀에는 여전히 백발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득 모여서 자기들만의 축제인 듯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바바라가 좀 지쳐 보여, 홀 뒤편의 바 쪽으로 데리고 갔다. 룩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피노 누아 두 잔을 주문하고 구석에 따로 놓인 작은 식탁에 가서 앉았다.

“바바라. 어제 들려주신 얘기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한잔 내는 겁니다. 고마웠어요.”

“천만에요. 선생님 같은 분께라면 얘기해 드리는 보람도 있고 즐거움도 있죠.”

“그런데, 바바라! 어떻게 그리 자세한 이야기를 알게 됐지요? 그게 또 궁금해지는데요?”

나는 사실 별 생각 없이 이 질문을 던졌다. 다른 사람들도 웬만하면 다 아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바라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는 것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꼭 대답할 필요는 없어요.”

“아니에요. 어제 얘기할 수도 있었던 건데요. 실은... 제임스가 저의 오빠랍니다.”

“네에? 정말 오빠예요?”

잘못 들었나 해서 일부러 <오빠>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그러나 곧 이어 바바라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고서는 스스로 대답을 하듯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숙도, 언제고 오빠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느라고 하는 거지요.”

그녀는 내쳐 거기까지 말했다.

“아아, 그러면 갤러리에서 도슨트를 하는 것도 역시 오빠를 기다리느라고... 오빠가 시인 겸 미술가시니까...”

“그런 기대도 있지요. 그 갤러리는 오빠가 설립 때부터 드나들던 데니까요. 설립자하고 친하셨거든요.”

“그래요? 설립자가 누군데요? 혹시, ...변호사 톰?”

“맞아요. 역시 상상력은 최고세요.”

작은 웃음 밑에서 슬픈 표정은 이미 지워지고 없었다.


(#4.d.)

바바라의 노트북 컴퓨터를 빌려서 조금 전부터 윤아에게 이메일을 쓰고 있다. 전화를 걸거나 문자 메시지를 보내지 않고 이메일을 쓰기로 한 것은 우선 얼마나 긴 이야기를 쓰게 될지 몰라서였다.

나는 맨 먼저, 지나간 생애의 절반이 넘는 기간 동안 모든 것을 함께 했던 아내와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리고 윤아와 사귀며 지나 온 최근 일 년의 시간에 대해서도 감회를 말하고 싶었다.

카멜의 아름다운 해변과 판당고 이야기도 하고 싶었고, 여인숙의 낮은 창문 위에 걸린 유니콘의 뿔 이야기와 제임스, 유나, 그리고 톰 이야기도 자세히 들려주고 싶었다.

피노 누아와 캐버네 소비뇽, 그 두 가지 포도가 자라나서 서로 다른 와인이 되는 이야기, 그것이 사랑에 비유되며 가지는 의미들... 그런 모든 생각을 그녀에게 낱낱이 써 보내고 싶었다.

특히 메일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는 윤아와의 결합이라는 주제에 관해서 어느 쪽으로든 아주 명쾌한 결론을 맺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이야기들은 나중에 직접 윤아 앞에서 들려주기로 마음을 바꾸고, 메일의 첫 부분을 이렇게 써내려갔다.

“윤아, 우리에게 다가올 날들이 온통 사랑의 향기만으로 가득하리라고 약속하지는 않겠소. 앞으로 남은 시간들의 의미를 함께 찾아 나가고 싶을 뿐이오. 뙤약볕과 찬 바닷바람의 교차 속에서 자라난 포도알들이 마침내 깊은 맛이 나는 검붉은 와인으로 빚어지는 기쁨을 위해 하루하루 포도밭에서 늙어가는 농부들처럼, 당신과 함께 우리의 캐버네 소비뇽 포도를 가꾸고 싶소. 혹 우리가 겪을지도 모를 고통의 순간들로 인해 포도알들이 채 자라지 못한 채 땅에 떨어지고 말게 되더라도, 그 때까지 우리가 열정과 진심을 포도밭에 쏟아 붓기만 했다면 아무 후회가 없으리라고 믿소.”

나는 잠시 머리를 들어 낮은 창문으로 바다를 내다본다. 십년 전 아내에게서 선물로 받았던 그 아침바다 위를 어린 갈매기 몇 마리가 천진스럽게 날고 있다. 희디흰 모래밭에는 아내의 작은 발자국이 한 줄로 남아 있으리라. 그 발자국을 따라 서쪽으로 계속 가면, 이제 막 단잠에 빠진 윤아가 푸른 바다의 마법에 걸린 듯 꿈속에서 끝없이 춤을 추는 모습을 만날 수 있으리라.*

                                                     ---<문학과 의식> 동인지 2012

by PlutoGuy | 2012/11/27 04:24 | (LIVE)<새소설집> 감상여행 | 트랙백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